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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죽이기

슈가메트누누 2022. 11. 28. 00:23

스토리텔링 죽이기

네 살에서 열 한 살 사이에 해럴드는 텔레비젼과 유튜브에서 들은 대사를 툭툭 내뱉기도 하고 시엠송을 흥얼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게 언제나 대화 속에서 적절하게 녹아들었습니다. 또한 어려운 단어도 곧잘 적절하게 구사하고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의식적으로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또 폴 매카트니와 윙스가 부른 노래의 가사를 불쑥 내뱉기도 하였는데, 묘하게도 상황에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이럴 때면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해럴드를 바라보며 말하였습니다. "네 눈안에 노인이 한 명 들어 있구나"

그러나 해럴드의 뇌 속에 숨어 있는 어른은 없었습니다. 그저 모형 합성기가 하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롭과 줄리아는 해럴드의 인생을 완벽하게 조직하였습니다.

날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언제나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였고, 그러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습관적인 일상이 해럴드의 마음에 근본적인 구조를 구축하였습니다. 

해럴드의 마음은 이 질서와 규칙성에서 탈출하여 반역의 모험을 떠났습니다. 이 모험에서 그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것들을 마술적인 방식으로 결합하였습니다.

물론 롭과 줄리아는 아들의 풍부한 상상력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로 아들이 현실의 삶을 사는 데 문제가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대형 마트에서 얌전히 카트에 앉아 있는데, 해럴드는 카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통에 늘 붙자고 말려야 했습니다. 또 유치원에서도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 말을 잘 듣는데 해럴드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거나 해야 할 일을 진득하게 붙잡고 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고 늘 정신이 없었습니다. 롭과 줄리아는 해럴드가 흥분하여 난리를 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람에 녹초가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어떡하든 해럴드가 조신하게 행동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정도로 해럴드는 공공장소에서 골칫덩어리에 말썽쟁이였습니다.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한 간담회에서 해럴드를 지도하는 교사들은 해럴드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지도하기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해럴드는 선생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줄리아는 서점에서 해럴드를 지켜보면서, 어쩌면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 장애)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유치원
유치원

어느 날 저녁, 해럴드가 유치원에 있을 때였습니다. 롭이 아들의 교실 앞을 지나쳐 가고 있는데, 녀석이 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녀석의 주변에는 작은 장난감이 즐비하게 많이도 놓여져 있었습니다. 왼편에는 노랑색 군인 인형들이 한 무리 서 있었고, 레고 우주선들이 이들 곁에 즐비하게 촘촘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트럭들이 서로 충돌할 듯이 정면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해럴드는 군인 병사들을 적진 한 가운데로 옮긴 뒤 방심하고 있던 적군을 모조리 다 쓰러뜨렸습니다.

전투가 치열해졌다가 소강상태를 보임에 따라서 해럴드의 목소리도 높아졌다가 낮아졌습니다.

핼러드는 마치 스포츠 중계방송을 하듯 실감나게 현장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롭은 복도에 서서 약 10분 쯤 해럴드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해럴드는 롭을 흘낏 바라보고는 곧 다시 전쟁으로 돌아갔습니다. 

해럴드는 봉제 인형 원숭이를 격려해주었습니다. 키가 5센티미터쯤 되는 플라스틱 군인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닏. 또 자동차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었고, 봉제 인형 원숭이를 꾸짖었습니다.

해럴드의 이야기 속에는 장군도 있고 사병도 있었습니다.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었으며, 치과의사도 있고 경찰도 있고 소방관도 있고 성형외과 의사도 있었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해럴드는 제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받은 인물들의 행동 모형을 온전하게 파악한 것 같았습니다. 

어떤 놀이에서는 전사가 되고, 어떤 게임에서는 의사나 요리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상하면서 연기한 것 입니다.

해럴드가 하는 이야기 가운데 많은 것은 미래의 삶에 관한 내용, 어떻게 하면 명예와 명성을 얻을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롭과 줄리아 그리도 두 사람의 친구들은 종종 돈과 안락함을 상상하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럴드와 또래 친구들은 영광을 상상하였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해럴드의 친구 몇 명이 집으로 놀러와 해럴드 방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해럴드는 장난감이 모두 소방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어떤 집에 불이 난 것을 상상하며 호스, 트럭, 도끼 등 불을 끄는 도구를 챙겼습니다. 아이들은 전체 이야기 속에서 역할을 하나씩 맡았습니다.

롭이 살그머니 다가가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해럴드는 안타깝지만 작은 나폴레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누가 트럭을 운전하면서 누가 호스를 나를 것인지 말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만든 가상의 세상에서 해야할 일에 대해서 정교하게 역할 분담을 하고 규칙을 정하였습니다. 

상상 속에 존재하는 자유로운 세상이었지만 각자 역할을 맡는 다는 것은 분명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규칙을 정하는 일에 아이들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롭은 이야기 자체보다 규칙이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롭은 아이들이 모두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놀이는 평온한 상태에서 위기가 발생하고 위기를 극복한 뒤에는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온다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평화로운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그러나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아이들은 힘을 합쳐서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승리한 다음에는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행복하게 잘 산다'로 끝났습니다. 놀이에 참가한 아이들은 모두 명성과 명예를 얻었습니다.

롭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20분 동안 지켜보다가 자기도 끼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하고 삶을 무질서 그 자체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식탁에 앉아서는 도무지 주의를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싱크대에서 무슨 일이 생겼고, 해럴드는 거기에 신경을 써야 하였습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 때문에 냉장고로 가서 문을 열어야 하였고, 커피메이커 옆에 놓인 편지봉투에 편지를 꺼내 봐야 하였습니다. 

해럴드는 자율롭기는 커녕 등불과 같은 자신의 의식이 남긴 유산에 희생되는 가여운 희생자일 뿐이었습니다.

비논리적이고 무작위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온갖 생각에 마음을 뺏겨 산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반응을 스스로 조정할 수 없었습니다. 해럴드는 똑똑해서 자신의 상태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솟구치듯 분출하는 혼란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정말 나쁜 학생이라고 자책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솔직히 상태를 더욱 나쁘게 만든 사람은 줄리아였습니다. 참았어야 했는데 참지를 못하였습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는 본격적으로 악으로 깡으로 악다구니를 써가며 발악을 하였습니다.

"넌 도대체 왜 이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숙제 조차 제대로 하거나 끝내지를 못하는 거니? 이유는 너도 매우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알면서도 하지를 않냐고!"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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